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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책

[책] 백조와 박쥐 - 히가시노 게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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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요... 라기보다 아무래도 선뜻 이해하기는 어렵죠. 나는 그 기분, 잘 모르겠던데요."
나카마치는 두부를 입에 넣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빛과 그림자, 낮과 밤, 마치 백조와 박쥐가 함께 하늘을 나는 듯한 얘기잖아요."

 

이 책의 플롯은 『용의자 X의 헌신』과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에서 사용된 소재들이 섞여 있는 느낌입니다. 어쩌면 『붉은 손가락』까지도. 달리 설명하면 좋은 재료가 훌륭한 요리사에게 맡겨진 느낌. 쉴틈없이 이어지는 전개에 잠자리에 누웠다가 결국 새벽 2시에 마지막 책장을 넘기게 되었습니다. 묵직한 소재, 짜임새 있는 전개, 세밀한 감정 묘사, 현장감. 히가시노 게이고를 표현하는 여러 수식어를 가져다 붙여도 모자라다는 느낌입니다. 꼭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리며 나름의 독후감을 작성해보겠습니다.

 

지명을 찾아가며 읽어보자

외국 소설을 읽을 때 어려운 점 중 하나는 소설에 등장하는 지명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알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 얼마나 먼 거리인지는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죠. 반면, 일본 여행에 10조를 쓴 대한민국 사람들 중에서도 '도쿄에서 나고야까지' 가 얼마나 걸릴지 쉽게 떠올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정확히는 아이치현이죠. 그런 의미에서 도쿄와 나고야 위치를 간략히 보고 가겠습니다. 꽤 멀리 위치합니다. 또, 도쿄 안에서도 미나토구 해안이나 스미다가와테라스 산책로와 같은 지명이 등장하는데, 이를 찾아보며 읽는 즐거움은 덤으로 남겨 놓겠습니다.

 

인상 깊었던 장면

도쿄 미나토구 해안 길가에 주차된 차량 뒷자석에서 55세 변호사 시라이시 겐스케의 시신이 발견됩니다. 복부에는 칼이 찔린 상태였고 그의 스마트폰은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항상 약자의 편에 섰으며, 정의롭고 헤아릴 줄 아는 성격의 소유자였던 사람으로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원한을 가질 만한 사람이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그럴리 없다' 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고다이 형사와 나카마치 순경이 한 팀이 되어 수사를 시작하는 모습으로 소설은 시작됩니다. 고다이 형사는 변호사 사무실에 걸려온 전화를 하나씩 뒤져가던 중 아이치현 안조시의 구라키라는 사람을 만납니다. 무언가 수상한 증언과 태도에서 냄새를 맡은 그는 결국 증거를 찾아내고 나카마치와 함께 다시 한 번 구라키 집을 방문해 결국 자백을 받아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33년 전 '히가시오카자키역 앞 금융업자 살해 사건' 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히가시오카자키역 사진, https://www.agui.net/met/metsta-higashiokazaki-1-20-ss.html

 

1984년에 용의자의 자살로 종결된 살인 사건이 2017년 한 남자의 자백으로 수면위로 떠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공소시효를 훌쩍 넘긴 사건이었기에 자백을 함으로써 얻을 것이 없었던 그에게 자백을 완전히 믿어버리고 수사는 급속도로 종료되기 시작합니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떠올랐던 짤이 있습니다. 소설을 읽을 때 더 두려운 것은 무엇인가?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는데 책이 반이나 남은 상황일까. 아니면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는데 책이 끝나가는 상황일까. 저는 구라키의 자백을 읽으며 그의 말에 모순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80%는 남아있는 책을 보며 앞으로 어떤 전개가 펼쳐질지 정말 기대되더군요.

 

종장이 가까워 질 수록 사건의 진실을 탐구하는 세 사람의 시점이 전환되며 빠르게 극이 전개되었습니다. 사건을 수사했던 고다이 형사. 구라키의 아들 가즈마. 살해당한 변호사의 딸 미레이. 이들의 복잡하고도 기묘하면서 비현실적인 조합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현실과 허구 그 사이에 그어진 선을 교묘히 넘나들며 작가의 상상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역량이 여실히 펼쳐진 부분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소설에서 제일 분노했던 부분은 노인들을 등쳐먹는 하이타니를 볼 때입니다. 더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소설을 읽는 재미를 뺐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여기까지만 쓰고, 대신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간단히 써보려고 합니다. 우선, 약장수나 사주꾼이나 소설에 나오는 하이타니나 말로 사람을 꿰어 금전적 이익을 취하면서, 말에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을 저는 아주 싫어한다는 것. '아님 말고' 식으로 툭 던진 말들이나 행동들, 어쩌면 악의가 숨어있었을지도 모를 그런 덜떨어진 행동들을 보고있노라면, 어릴 적 그런 상술에 속아 한짐 보따리를 싸들고 들어오던 외조모가 생각나 가슴이 아픕니다.

 

옮긴이와 함께 다시 읽어보기

옮긴이의 글을 읽으며, 글을 잘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책을 읽으며 느꼈던 감정이 고스란히 마음으로 전해져왔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옮긴이의 글 전문을 블로그에다가 빼다 박고 싶었습니다만 하나 남은 양심이 이를 허락하진 않았네요. 대신, 옮긴이의 글을 읽으며 인상 깊었던 글귀를 두 개 적어보고 나름 첨언을 달아보려 합니다.

 

이 작품은 가히 그 이름에 값할 만한 대작이다. '죽어 마땅한 인간'이라는 사적인 판단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 정의를 위한 분노의 절차는 무엇인가. 경찰, 검찰, 변호사, 판사 등 공정한 판결을 내리기 위한 조직의 애환과 한계와 맹점. 공소시효 폐지와 소급 적용을 둘러싼 문제점. 언론의 무신경한 취재 경쟁과 상업화의 분류(奔流) 속에서 기민하게(혹은 야비하게) 이루어지는 취재 현실. 가해자와 피해자 가족에게 쏟아지는 인터넷상의 경박한 재단과 호기심의 배설. 살인 자체에 대한 욕망이라는 뒤틀린 인성 등등. 인간의 죄와 벌을 둘러싼 바로 지금의 굵직굵직한 논의들이 한자리에 총망라된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다루는 소재를 깔끔하고 담백하게 요약해냈습니다. 긴 소설을 여과기에 부었다면 그 밑으로 쌓인 문장들은 딱 이만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만큼 이 책에서 전달하고자 했던 소재들을 깔끔하게 요약해냈습니다.

 

정의와 공정이란 무엇인지, 단죄의 균형을 맞출 가늠자는 어떤 기준에 따라야 하는지, 저절로 생각해보고 찾아나가는 경험은 이 책에 투자해준 독자 몫의 배당금,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성숙한 지성으로 착착 쌓여가지 않을까. 이 작품의 가장 큰 마법이자 강점으로 꼽고 싶다.

 

이 책을 읽는데 들인 시간이 독자가 책에 투자한 투자금이라면, 이를 통해 쌓이는 성숙한 지성과 사고의 경험을 독자 몫의 배당금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전부터 이런 글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글을 쓰려면, 그만큼 좋은 표현들을 많이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완독 후 서평을 찾아보는게 습관이 되겠네요.

 

마치며

끝에도 옮긴이의 문장을 흉내내며 마쳐보겠습니다. 죄와 벌에 대해 공정하면서도 합당한 판단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영원히 중심을 잡아가는 과정 속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때, 이 이야기를 읽으며 느꼈던 감정과 떠올렸던 고민들이 우리를 더 견고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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